얼마 전에 고쳐달라고 가져온 컴퓨터를 손보다가 메모리가 좀 부족한 것 같아서 256메가 DDR 램을 하나 샀는데, 컴퓨터 주인이 원하지 않는 것 같아 서랍에 넣어놓고 한동안 지나버렸다. 그것을 내 컴퓨터에 쓸 수 없는 것은 내 고물 컴퓨터는 SD 램을 쓰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인터넷 피시 바람이 불었을 때 사 온 이 컴퓨터는 겉모양만 그대로일 뿐 수많은 업그레이드를 거쳤다. 우선 사오자마자 모뎀이 자꾸 끊기는 현상이 발생해서 모뎀을 바꿔야 했고, 얼마 후 ADSL을 쓰게 되면서 ADSL 모뎀을 다시 사야 했다. 윈도 XP가 나오자 그것 쓴다고 64메가 메모리는 빼서 남 주고 256을 끼웠다.

그 외에도 디빅 영화붐에 발맞춰 CD-RW 드라이브를 달았고, 쿨링팬에서 탱크소리가 나는 바람에 그래픽카드도 바꿨고, 모란이네 컴퓨터 하드가 고장나는 바람에 내 것 떼어주고 나는 80기가짜리로 새로 달았다. 거기다 랜카드도 깔고 Firewire 카드도 끼웠다. 그러니까 CPU와 마더보드만 빼고 완전히 딴 컴퓨터가 된 것이다. 모니터는 큰 맘 먹고 산 17인치 CRT가 어느 날부터 맛이 가는 바람에 중고 15인치를 쓰게 되었으니까 이건 업그레이드가 아니라 다운그레이드가 되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부품을 업그레이드해도 펜티엄3 500 CPU로는 급변하는 소프트웨어 환경에서 버틸 수가 없다. 그래서 느려터진 컴퓨터를 쓰다 보면 인내심이 증가하거나 혹은 성질을 버리거나 하게 된다. 하긴 나한테 고쳐달라고 부탁들어오는 컴퓨터들 보면 아직도 윈도98을 쓰는 기종들이 많긴 하더라만...

밖에 나갈 때는 언제나 CD 가방을 챙겨가는 한솔이, 그 집 컴퓨터에 게임을 깔아주기 위해서다. 이 녀석은 인터넷에서 게임 다운받는 것을 터득한 이래 친구들 사이에서 게임 공급자 노릇을 한다. 그러니 우리 집 고물 컴퓨터는 늘 몸살이다. 그래도 한솔이는 마음이 여리고 착해서 "시끄러!" 한 마디면 새 컴퓨터 사달라는 소리가 쏙 들어간다.

내가 교회용으로 산 최신형 노트북 컴퓨터를 쓰게 되면서 고물 컴퓨터는 한솔이 전용이 되자 컴퓨터는 더 느려졌다. 그래서 컴퓨터로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아내의 불만도 쌓여가고 있었다. 노트북에는 게임을 깔지도 못하게 했는데도 한솔이 녀석은 내가 없을 때 와서 노트북으로 게임을 하곤 한다. 데스크탑에 깔려 있긴 하지만 실행이 되지 않는 게임들이 네트웍을 통해 노트북에서 실행되는 것이다.

나 혼자만 성능 좋은 컴퓨터를 쓰고 있다는 것 때문에 슬슬 미안한 생각이 들려고 하는데, 컴퓨터 느리다고 원성은 높아가고 또 졸지에 처치곤란한 램이 생기게 되니 아예 컴퓨터를 확 업그레이드해 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CPU를 바꾸려면 우선 마더보드부터 바꿔야 한다. 요즘에는 통합보드도 성능이 괜찮은 것들이 많다. 그래서 비용을 많이 줄일 수 있다. CPU는 벌써 3.6기가까지 나온 것 같은데, 최소한 2.8기가 정도면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출 것 같다. 아직은 가격 때문에 2.8에서 3.0기가 CPU가 많이 팔리는 모양이다.

금요일 오후, 큰 마음을 먹고 컴퓨터 조립가게를 찾아갔다. 우선 케이스에 마더보드와 CPU만 조립해 달라고 했다. CPU는 2.8기가 프레스캇으로 정했다. 이 놈은 2차 캐시메모리가 1메가다. 가게에 재고가 없어 전화로 주문을 한다. 월요일에 와서 찾아가라는 말을 듣고 나왔다.

내가 쓰는 노트북의 CPU는 캐시메모리를 1메가로 늘려서 성능을 대폭 개선한 센트리노이다. 그래서 프레스캇도 그런 식의 성능 개선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아무래도 미심쩍다.  그날 밤 프레스캇에 대해서 공부를 했다.

그런데... 2.8기가 프레스캇은 최악의 선택이었다. 인터넷이 프레스캇에 대한 분노와 성토로 끓어오르고 있었다. 열 많이 나고 소음 크고 전력소모 많고, 그래서 뻑하면 다운된다는 것이다. 아이쿠! 이거 실수다. 프레스캇 코어가 새로운 기술이지만 2.8기가에서는 오히려 부작용만 크다. 차라리 성능에는 거의 아무런 차이도 없는 노스우드 코어를 선택했어야 했다.

그렇게 불안 속에서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이 되자 학교에 갔다가 점심시간을 이용해 시내로 나왔다. 컴퓨터 가게에 갔더니 조립해 놨으니까 가져가란다. 내가 프레스캇 싫다고 했더니 그럼 다른 걸로 바꿔주겠단다. 노스우드로 바꾸기로 하고 보니 지갑을 안 가져왔다. 나중에 찾아가기로 하고 그냥 나왔다.

수업을 마치고 다시 컴퓨터 가게로 갔다. 그런데 인보이스를 보니 가격차이가 엄청 많아졌다. 웬일인가 했더니 CPU가 3.0이다. 내가 2.8로 해달라고 했지 언제 3.0 달라고 했냐니까 재고 중에 2.8 노스우드는 없고 3.0 노스우드 뿐이란다. 이거 또 고민이다. 그냥 확 3.0으로 해 버려? 그렇지만 돈이 100달러나 차이난다. 에라, 안되겠다. CPU 빼!

그렇게 해서 케이스에 마더보드만 달랑 붙여가지고 집으로 왔다. 그리고 그날 밤에 인터넷으로 2.8기가 노스우드를 주문했다. 가게에서 사는 것보다 50달러 정도가 싸다. 그렇게 주문한 CPU가 수요일 오전에 도착했다.

내가 산 마더보드는 듀얼 채널 메모리를 지원하기 때문에 똑같은 램 두 개를 쌍으로 써야 한단다. 그래서 램을 하나 더 사 왔다. 그렇게 되니 펜티엄4 2.8기가에 메모리 512메가라는 빵빵한 사양이 되었다. 흥분되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한솔이와 함께 마더보드에 CPU와 메모리를 장착했다.

목요일, 수업이 없는 날이다. 옛날 컴퓨터를 해체해서 하드디스크를 꺼냈다. 그래픽카드는 그냥 남겨두기로 했다. 우선 마더보드에 있는 그래픽 기능이 어느 정도인지 보고, 나중에 짜투리 부품들 모아서 사양 낮은 컴퓨터를 하나 더 만들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집채만한 컴퓨터가 싫다. 그래서 미니타워 케이스를 선택했더니 부품 조립하는 게 고통이다. 하드 디스크와 CD 라이터만 빼서 새 컴퓨터에 달았다. 플로피는 달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윈도를 설치하는데 계속해서 에러가 난다. 이것 저것 별 짓을 다하면서 하루를 다 보냈지만 설치가 되지 않는다. 심지어는 윈도 98을 깔고 그 위에 XP로 업그레이드할 생각까지 했지만, 98로 대용량 하드를 포맷하는 것만 해도 몇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 포기했다. 학교에서 돌아온 한솔이를 시켜서 애쉴리 준 영문 윈도 XP를 찾아오라고 했다. 줬다가 다시 뺏어가면 엉덩이에 뿔난다는데, 인심을 잃더라도 당장 급하니 할 수가 없다. 그런데 영문 윈도 역시 똑같은 에러가 난다.

데스크탑 컴퓨터로 인터넷에 접속하고 랜으로 연결해서 노트북에서도 인터넷을 쓰고 있었는데, 그렇게 되니 통 인터넷에 접속도 못하게 되었다. 당장 인터넷을 쓰려면 옛날로 돌아가야 하는 수밖에 없다. 문제는 나중에 고치기로 하고 다시 하드 디스크를 옛날 컴퓨터에 달았다. 그런데 역시 윈도 설치가 안 되는 것이다. 옛날에 보니까 더 예쁜 여자가 나타나면 사귀던 여자 차버리고 예쁜 여자에게 갔다가 딱지맞고 전에 사귀던 여자한테도 버림받는 녀석들이 종종 있었는데, 내가 지금 그 꼴이다.

나는 참을성이 부족해서 이런 일을 그냥 놔두고 잠을 잘 수가 없다. 밤을 새워서라도 결말을 보아야 한다. 그런데 무슨 조화였을까? 한밤중에 윈도가 아무 이상없이 설치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번에는 인터넷 접속이 되지 않는다. ADSL 라인이 활성화되지 않는 것이다. 이건 잠 안 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풀리지 않는 문제는 붙잡고 늘어진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덮어두고 있다가 나중에 열어보면 쉽게 풀리는 수가 많다.

금요일이 되었다. 한나절을 씨름하다가 다시 컴퓨터 케이스를 열었다. 그리고 ADSL 모뎀을 빼서 다른 슬롯에 끼웠다. 그랬더니 금방 접속이 된다. 알 수 없는 일이다. 미니 케이스라서 PCI 슬롯이 세 개뿐인데, 하나가 맛이 갔으면 곤란한데...

그렇게 해서 일주일에 걸친 컴퓨터 조립 작업이 끝났다. 프레스캇이 아니라도 이 컴퓨터는 너무 요란한 소리가 난다. 조용히 살려면 아무래도 무소음 쿨러를 따로 사서 달아야 할 모양이다. 또 사야 할 게 많다. 당장 한솔이는 그래픽 성능이 떨어져서 몇몇 게임이 실행되지 않는다면서 Radeon 9600 수준의 그래픽카드를 사자고 성화다. 하드디스크를 하나 더 사면 옛날 컴퓨터도 다시 쓸 수 있는데, 요즘엔 시리얼 ATA 하드디스크가 나왔다. 좁은 미니케이스에서 IDE 케이블 연결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닌데 몇 차례 뜯었다 다시 다는 일은 차라리 고문이었다. 그런데 SATA 케이블로 연결하면 정말 좋긴 하겠다. 또 조금 있다가 DVD 라이터도 사야 할 테고. 정말 넘어야 할 유혹은 모니터다. 최소한 17인치 LCD를 사야 할 테니까. 휴~ 끝이 없군.

쌩쌩 돌아가는 저 컴퓨터도 몇 년이 지나면 느려터진 애물단지가 될 것이다. 그럼 난 또 갈등을 거듭하다가 이것 저것 사 모아 새 컴퓨터를 조립하게 되겠지. 컴퓨터... 여러 모로 유용한 도구인 것은 틀림없집만, 또 이렇게 사람을 고생시키기도 한다. 자꾸만 새로워지고 좋아지는 제품은 끝없이 유혹의 손길을 보낸다. 이제는 컴퓨터를 몰라도 고생이고, 웬만큼 안다고 하면 더 고생이다. 옛날 컴퓨터 없었을 때가 불편하긴 했지만 좋았던 점도 많았던 것 같다.

2004/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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