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사기를 머리에 떠올릴 때마다, 나는 황홀감과 분노 · 증오를 동시에 느낀다. 현대인의 ‘지적 생활’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이 강력하고 장엄한 machine! 이 기계는 고도의 정밀함을 가지고 있어, 문서를 일관되게 대량으로 복제해 낸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말이다!
복사기는 완벽한 복제 능력을 과시하는 것이다. 게다가 요새의 복사기는 sorting의 기능, 자동 스태플러 기능까지 갖추어, 눈부시게 편리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만약 현대인의 ‘편의’를 돌보아주는 신을 하나 상상으로라도 만들어낸다면, 그 신은 텔레비전에서 본 복사용지 CF의 그 복사기로봇과 비슷한 형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진짜 그렇다. 끊임없이 종이를 먹고 토해내는 왕성한 섭식활동을 자랑하는, 아름다운 불빛으로 문서면을 핥아, 그대로 배출구로 ‘쏟고 쏘아대는’, 정력적인 신!
우리는 문서들, 질적으로 뛰어나든 아니든 간에 여하튼 우리 자신의 지적 소산이라 할 수 있는 그런 문서들을 ‘아무런 회의(懷疑) 없이’ 이 역동적 신에게 맡겨 버림으로써, 또 하나의 희생제물을 그에게 바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순백의 복사지는 순간 더럽혀진다. 운이 좋으면 문서는 소중히 보관되기도 하겠지만, 그 대개는 준 쓰레기의 취급을 받게 된다. 이면지 활용이란 종이로선 패자 부활의 기회이겠지만, 한 번 더럽혀진 영혼의 이면이 또 한 번 겁탈을 당하는 꼴이 될 뿐이다. 결국 복사기의 짝, 또 다른 대지의 데메테르 여신, 포악하고 식욕이 왕성한 파쇄기만이 그들을 기다리며 입맛을 다신다.
그래, 이렇게 복사기는 언제나 더 많은 양의 것을 복제한다. 그것이 나에게 토악질을 불러 일으킨다. 발표용, 공문서 회람용, 인간은 모두 ‘충분한 양의 복제물’을 요구하고, 복사기는 이 요구에 한 치의 의심이나 불평 없이 복종한다. 그러나 사실 충분한 양이 아니라, 언제나 과다한 양이다. 과대 증식하는 바이러스처럼, DNA만을 끝없이 복종하고, 동일한 유전형식의 동료들에 그토록 무관심한 채 그들은 숙주의 조직을 갉아먹기 바쁘다. 대량 복제, 과다한 복제, 그 잉여분만큼의 지적허기가 주체 못할 정도로 나를 침식한다.
그리고 내가 복사기를 그토록 증오하는 또 다른 이유. 그건 그들이 극도의 예민함과 소화불량, 결석, 요실금·······.
그들이 식탐으로 소화불량에 걸렸을 때, LCD 계기반은 자신의 아픈 부위를 요란하게 반짝이며 지시한다. 그 요란하고 적극적이며 천박한 고통의 호소.
당사자는 어찌할 바 몰라 하며 복사기를 달래야 한다. 기계신과 인간노예 사이. 그 기묘한 역전. 누가 주인인가.
복사기는 끝없이 앙탈을 부린다. 절대 타협하는 법이 없다.
그가 배가 고파도 그렇다. 토너가 떨어졌을 때, 그들은 결코 마지막 힘을 짜내어 임무를 마친다든가 하는 충성을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복사기의 정력적 활동 속에서 유순한 타협과 복종만을 본다. 그러나 한 번 탈이 발생하였을 때 그들이 보이는 절대적 고집, 비타협, 관계의 역전 역시 무시하면 안 된다.
······
당신과 함께 타임머신을 탔다.
우리는 먼 미래로 비약한다. 그 곳에도 복사기가 있다. 과거에는 복사기에 얼굴을 대고 버튼을 누르면, 그 눌린 단면이 평면의 종이에 2차원으로 구현되었다. 지금은 얼굴이란 걸 3차원으로 스캔하여, 원 대상과 똑같은 질감, 분자구조를 지닌, 똑같은 머리털과 똑같은 타액, 똑같은 혀 · 입술, 똑같은 악관절, 똑같은 귀 · 코, 연골을 지닌 머리통이 사출구에서 ‘툭’하고 떨어져 내린다.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는 흙과 거의 비슷하다고 한다. 그만큼 인간을 구성하는 원소는 간단하다. 그러나 고도로 조직화되는 결합방식이 문제였는데, 지금의 인간은 이것을 기어이 모방, 문제를 해결하고야 만 것이다.
그렇게 하여 인간 복사기가 생겨났다. 복사기는 진정한 신이 되고야 말았다.
어찌된 게 지금도 문제는 충분한, 안전한 양이다. 잉여인간이 생겨난다. 게중에는 원판이 비뚜로 놓인 경우가 있어, 어긋난 비례의 인간이 생겨난다. 인간원소의 토너가 고갈되는 경우가 있어 수많은 폐지, 아니 폐인이 생겨난다. 폐인이 생겨나자 폐인의 이면 활용, 즉 혼종인간이 생겨난다. 차별이 생겨난다. 다른 인간에 대한 다른 명칭이 생겨난다. 폭력이 생겨난다. 살인이 생겨난다. 복사인간은 진정한 인간이 아니므로, 린치해도 마땅하다는 견해가 생겨난다. 살인 아닌 살인이 판을 친다. 생지옥······.
머리를 흔들어 본다. 다시 이 세계이다. 앞으로 몇 시간 후면, 수업 발표가 있다.
근데, 수업 인원이 다 합해 모두 몇 명이더라······?
어찌 되었든 간에, 충분한 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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